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생애 (문단 편집) === 엽기적 행각 === 밑은 그 시절 차우셰스쿠 및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실화 모음이다. * 차우셰스쿠가 보는 서류는 보통 글씨에 비해 '''3배'''나 크게 쓰여졌는데, 그 이유는 차우셰스쿠가 지독한 [[원시]]였음에도 공석은 물론(?) 사석에서도 [[안경]]을 쓰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 사실 비슷한 이유로 안경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으며, 인기가 많은 간행물은 이런 사람들을 위해 큰 글씨로 된 간행물을 별도로 내고 있다.]이었다. 이 때문에 종이와 잉크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것은 아래의 다른 사안들에 비하면 그나마 [[새발의 피]]였다. * 국가의 모든 결정은 거리 이름 변경 허가 여부와 같은 사소한 것조차 전부 차우셰스쿠 부부의 직접적인 승인을 거쳐야 했으며, 차우셰스쿠는 백화점의 진열장부터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의 실내 장식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제와 관련하여 최고의 권위자로 묘사되었다. * 지독한 [[결벽증]] 환자로, 세균 및 암살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는데, 실제로 차우셰스쿠는 [[1977년]]에 부쿠레슈티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부상자들로 가득 찬 병원에 갔을 때 병이 전염될 것 같아서 부상자들과 악수하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1978년]] 6월 13~16일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영국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와 악수한 직후 '''그 자리에서 바로 손을 알코올로 소독했다.''' 친한 친구나 가족, 친척, 지인 사이에서도 이랬다가는 [[손절]] 당해도 쌀 정도의 무례를 신뢰가 중요한 외교적 현장에서, 그것도 그 나라와 나라의 국민을 대표하는 국가 원수에게 대놓고 이랬다는 것은 한 마디로 ''''[[페르소나 논 그라타|나 당신 도저히 못 믿겠어.', '당신 더러워서 손 대기 싫어.]]''''라고 모욕을 줘버린 것이다.[* 게다가 차우셰스쿠의 방영 당시 여왕과의 만찬 등 모든 공식 행사들은 루마니아에서 TV를 통해 방송되었다.] 물론 엘리자베스 여왕은 이를 보고 일단 앞에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차우셰스쿠가 돌아가자마자 크게 분노하며 [[제임스 캘러헌|켈러헌 총리]]와 오언 외무장관을 호출한 뒤 '''[[격노|"어떻게 초대해도 저따위 인간을 초대할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며 매우 강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영국]]의 [[여왕]]이자 즉위했을 때부터 평생동안 총리와 내각의 정책에 대해 언급을 사양하며 정치적 행보를 최소화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이처럼 총리에게 화낸 것은 그때가 유일했다고 한다. * [[부쿠레슈티]]에 [[지하철]]을 건설하던 [[1978년]]에 차우셰스쿠는 대학교의 신입생들에게 할 환영 연설을 할 때 더 나은 배경을 얻기 위해 지하철 입구로 쓰기 위해 파낸 1만 2천 입방미터 정도의 구멍을 12시간 이내에 채우라고 요청했다. 이를 위해 밤새도록 수백 명의 노동자와 기계가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동원되었고, 도시의 다른 지역에서 나무를 뿌리뽑고 풀을 뽑아와 새로 심었다. 이렇게 전날 오후 7시에 멀쩡하게 있던 구멍이 단 '''11시간''' 만인 오전 6시에 완전히 메워진 후 [[벤치]]까지 갖춘 어엿한 [[공원]]이 탄생했다.[* 참고로 차우셰스쿠의 집권기에 부쿠레슈티에는 지하철 노선이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총 3개가 개통했다.] * 1978년에 영국에 방문했을 때 [[자유당(영국)|자유당]]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스틸(David Steel, 1938~)이 선물해준 검은색 [[래브라도 리트리버|래브라도]] 개 '코르부(Corbu)'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밤에는 항상 코르부와 같이 자고 셰로나라는 래브라도 암캐를 짝으로 지어주었다. 여기로 끝나면 전혀 기행이라고 볼 수 없지만, 차우셰스쿠는 거기서 더 나아가 코르부한테 침대, 텔레비전과 전화기, 고급 가구까지 딸린 전용 침실을 주었고, 이 [[개]]에게 최고급 고기를 먹였으며,[* 후술하듯 당시 루마니아인들은 한 달 동안 겨우 두 끼 분량의 고기만 배급받던 판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코르부를 보호하기 위해 개의 음식을 먹어보게 하는 전속의사까지 두었다. 게다가 런던 주재 루마니아 대사는 매주 새인즈버리즈(Sainsbury's)라는 슈퍼마켓에 가서 영국산 개 비스킷을 사다가 외교 가방에 넣어 돌려 보내라는 공식 명령을 받았으며, 심지어 코르부는 '''전용 [[리무진]] 행렬'''까지 가졌던 데다가 1989년 말에는 무려 '''[[루마니아군]]의 [[대령]]으로 추대되었다.'''(...)[* 이는 [[칼리굴라]]가 자신의 말을 [[집정관]]에 추대했다는 일화와 비슷한데, 칼리굴라의 일화는 루머에 불과하나(사실 칼리굴라의 기행들은 대부분 허위사실로 판명되었다.) 차우셰스쿠가 자신의 애완견을 대령으로 추대한 것은 '''사실이다.'''][* 이전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였던 [[라파엘 트루히요]]도 3살짜리 아들을 대령으로 앉히긴 했지만, 적어도 애완견을 대령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게다가 차우셰스쿠가 방문한, 부쿠레슈티 구시가지에 있는 어느 큰 병원 지하에서 코르부가 쥐를 잡기 위해 의사들이 기르던 고양이와 싸우다 코르부가 다치자 차우셰스쿠는 분노하여 그 병원을 통째로 없애버렸다. * [[1981년]]에 세계교회 개혁동맹이 루마니아에 2만 권의 성경을 배부했으나, 차우셰스쿠는 이 중 200권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도리 몰도바의 브라일라의 공장으로 보내 문자 그대로 '''[[신성모독|화장지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파쇄가 제대로 되지 않아 화장지에서 성경 구절이 보이기도 했다. 요즈음 시대에 이런 짓을 했다가는 [[나라 망신]]은 따 놓은 당상이고,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에 악영향이 되는 건 물론 국내에서도 종교계의 거센 반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무리하게 공업화 정책을 폈다가 외채와 국가 재정 적자가 심해지자[* 실제로 1971년에 12억 달러 정도였던 루마니아의 외채가 1982년에는 무려 130억 달러로, 불과 '''11년 만에 외채가 11배나 뛰어올랐다'''.] 1980년대 중반부터 [[중상주의|수입은 안 하고 수출만 하는]] 심히 엽기적인 정책을 밀어버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 정책 덕분에 1989년 봄에 '''계획 기간보다 이른 기간에 부채를 거의 다 갚았다는 것'''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당시 공산국가들은 [[계획경제]]에 유리한 [[중공업]]에 과도한 투자를 쏟아부었고, [[시장경제]] 위주로 돌아가는 [[경공업]] 분야에는 소홀했다. 그 결과 생필품이 모자란 상황이 생각보다 흔해서 그런 물품은 상당 부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서방 국가들도 비슷한 전략을 펼칠 때가 많았지만, 내수시장을 위해서라도 경공업 분야 전체를 무시할 수 없었고 정부가 굳이 지시하지 않아도 경공업 산업으로 수익을 거두려는 수많은 민간 사업자들이 알아서 생산하고 시장에 납품했기에 어느 정도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소련]]은 옛부터 본인들도 비누, 치약, 면도날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들조차도 모자라서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많이 발생됐고, 본격적 시장경제가 도입된 [[러시아]] 시절인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쳐 [[과자]]와 [[라면]] 같은 가공식품과 소비재의 상당량을 자체적으로 손수 생산하지도 못하고 [[대한민국]], [[중국]] 등지에서 수입해서 소비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도 바보는 아닌지라 자국 기업의 자체 생산도 비중이 적지 않지만, 문제는 외국 기업의 제품 수입량이 여전히 더 많다는 것이다.] 덤으로 이 '수입은 안 하고 수출만 하는~'이 단순이 외국제 생산품 수입을 막고 무조건적인 자국산 생산품 수출로만 끝났다면 말 그대로 수입만 안 하는 것이니 [[자급자족|그나마 괜찮겠는데]], 단순한 수입 중단이 아닌 사들일 수 있는 건 다 안 사고 팔 수 있는 건 무조건 다 팔아버리는, 그러니까 식량이고 자원이고 필요해도 수입해야 한다면 안 사고, 길 가는 아이가 먹고 있는 [[사탕]]이나 [[과자]], [[아이스크림]], [[음료수]]조차도 수입하겠다는 국가가 있다면 동의도 없이 다짜고짜 뺏어서 다 팔아버리기만 하는 정신나간 정책이라서 문제.[* 우리나라를 함 예로 들어보자면 당장에 외채 갚겠다고 국내에서 생산하는 [[쌀]]은 [[기아|다 팔면서]] [[석유]]는 [[정전|전혀 안 사오는]] 정책을 시행했다고 가정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게 모든 국내 생산품과 모든 수입품으로 확대된 차우셰스쿠의 정책은 루마니아라는 국가를 문자 그대로 '''[[사람|루마니아 국적자 2000만여명]]과 [[병신|차우셰스쿠]]만 있는 [[땅|238, 391km²의 허허벌판]]'''으로 만드는 멍청한 짓거리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이 정책으로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필요한 농산물들은 거의 다 수출당해 루마니아 국민들은 식량난에 허덕이게 되었으며, 공업에 필요한 원료나 기계 부속품들까지 수입이 금지당했다. 이렇게 정책이 '''폐업 직전의 재고처리'''와 비슷하니 멀쩡하던 나라라도 안 망할 수가 없다. 그런 와중에도 '특별 허가'를 받은 극소수의 물건들, 즉 엘레나를 위한 고급 밍크코트와 차우셰스쿠 일가의 사치품만큼은 특별히 수입이 허용되었다. * '''4살 ~ 12살'''밖에 안 된 어린이들에게 2개의 당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하고는 이를 '개척자와 매'로 포장했다. 다만 이건 공산주의 국가들은 원래 다 하던거다. * 차우셰스쿠의 가족과 친척들 중 40여 명을 [[낙하산 인사|정부의 요직에 앉혔다]]. 그 일례로 영부인 엘레나는 말할 것도 없는 정부의 2인자였으며, 그보다 8살 어린 남동생 일리에는 육군 장관이자 국방부 차관이었고, 또다른 남동생 니콜라에 안드루거는 내무부 차관 겸 경찰총장이었으며, 이보다도 어린 남동생이었던 이온도 농업과학아카데미를 이끌며 국가 경제 계획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엘레나와 함께 차우셰스쿠 사후에 권력을 세습받을 후보자로 예측되었던 차남 니쿠는 청년동맹 비서를 거쳐 [[트란실바니아]] 지역 남부의 시비우 주의 당서기였으며, 엘레나의 남동생도 노동조합을 총괄했다. 루마니아 사람들은 이를 '가족 사회주의'라고 불렀다. * [[헝가리인]]에 대한 탄압 정책을 실시하여 헝가리인의 토지 80%를 몰수해 루마니아인에게 재분배했고, 헝가리어 교육과 대화를 범죄로 간주한 후 헝가리인들에게 헝가리를 비난하는 내용의 교과서를 배우게 했으며, 심지어 '산업화 단지 조성'을 명분으로 헝가리인 마을들을 불도저로 대량으로 파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차우셰스쿠는 서구의 요청으로 1984년 5월 26일에 완공한 [[다뉴브강]]과 [[흑해]]를 연결하는 59.2km의 운하를 건설할 때 [[도브루자]]의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헝가리인[* 대부분 [[트란실바니아]]와 [[몰도바]] 지방에 거주했으며, 이들은 단순히 '''[[헝가리어]]를 썼다는 이유만으로''' 잡혀온 경우가 많았다.] 수십만 명을 동원했다. 얼마나 노동이 가혹했는지 수용자들 대부분이 운하 건설 도중 사망한 것은 물론, 이 운하의 별명이 아예 '죽음의 운하'였을 정도였지만, 차우셰스쿠는 이 사업을 '달갑지 않은 소수 집단'을 루마니아에서 몰아낼 기회라 여겼고, 완공 당시에는 이를 자신의 최고의 업적으로 포장했다. 운하 건설 비용은 당대 가치로 20억 달러(2022년 가치로 57억 달러)로 추산되었다. * 차우셰스쿠의 하인이 기르던 [[앵무새]] 한 마리가 훈련받은 대로 "니쿠 바보"를 연발했는데, 앵무새는 그 자리에서 포획되어 루마니아 비밀 경찰에게 [[코렁탕|끌려가 심문받은 뒤]] [[끔살|경찰들에게 목이 비틀어져 비참하게 죽었다]]. * 인민들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에도 [[평양시]]의 [[금수산태양궁전|주석궁]]을 보고 혹한 나머지 차우셰스쿠 자신의 치적을 기념한답시고 [[부쿠레슈티]] 시가지의 1/4를 파괴하고는 [[인민궁전]](Casa Poporului, 혹은 Casa Republicii)[* [[루마니아어]]가 과연 라틴계 언어라 그런지 바로 이해가 간다. 혁명 이후에는 Palatul Parlamentului(국회 궁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을 세웠다. 모든 건축 자재는 루마니아산이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exclusivnews.ro/casa_poporului.jpg|width=500]] 이 건물 하나를 세우기 위해 부쿠레슈티에 있는 유서깊은 석조 건축물들을 대거 철거했고, 근처에 있던 [[교회]] 하나는 통째로 35m 옮겨졌다. 이게 어느 정도 면적이냐면 부쿠레슈티 시가지 전체의 약 1/3에 달한다. 내부 장식도 '서양의 어느 바람둥이가 지은 것 같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호화로웠으나, 차우셰스쿠 본인은 5년 만에 죽어서 별로 오래 살아보지도 못했다. 이 건물은 2022년 기준으로도 단일 건물 중에선 세계에서 [[미국]]의 [[펜타곤]], [[태국]]의 신 국회의사당 다음으로 거대한, 세계 3위 규모의 거대한 건물이다.[* 물론 건설 당시에는 세계 2위였다.] 그러나 이 건물은 크기만 컸지 기능적인 면에서는 [[쓰레기]] 그 자체라는 혹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건물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심미안이라고는 전혀 없고 건축학 같은 것을 전공하지도 않었던 차우셰스쿠가 그저 기분에 따라 그때마다 설계도면과 디자인을 싹 다 바꿔버리는 일을 일삼은 탓에 설계 도면보다 건축 규모가 더 커져 균형미 같은 것은 찾아볼 수조차 없으며, 나중엔 재정난 때문에 [[대리석]]으로 반쯤 꾸며진 방을 [[시멘트]]로 덮어버리는 일까지 발생했다. 심지어 있던 계단을 철거하고 다시 만드는 일까지 있었다. 그가 세운 철기둥은 그가 사형되자마자 '''미관상'''의 이유로 철거되었다. 이 건물은 공산 정권이 무너진 뒤엔 루마니아 [[국회]]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인민궁전]] 항목 참조. * [[평양]]에 방문했을 때 도시의 모습을 본 뒤, '체계화 프로젝트'라는 계획을 세워 전국을 직선 배치로 개조하려고 1974년부터 수천 개의 마을들을 강제로 철거한 후 그 주민들을 엘리베이터와 부엌, 상하수도,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아파트]]에 강제로 이주시켰다. 특히 인구가 1천 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들이 '비합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집중적으로 파괴당했다. 이는 1979년부터 시작된 에너지 파동으로 중단될 뻔했지만, 1988년에 7천 ~ 8천 개의 마을을 파괴하려는 방식으로 재개하려고 했다. 차우셰스쿠의 고향 마을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기에 거의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었으나, 차우셰스쿠의 생가만큼은 허물어지지 않고 보존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차우셰스쿠는 '농업 혁명'을 명분으로 부쿠레슈티 부근 농민들이 살던 7천채 가량의 주택을 강제로 철거하고는 손쉬운 감시와 통제를 위해 '인민 센터'라는 아파트에 강제로 입주시켰다. 게다가 그 아파트 자체도 돼지우리와 비견될 정도로 조악했다. * 새로운 도시계획을 명목으로 부쿠레슈티에서만 16세기 초에 세워진 유서깊은 교회를 포함한 총 23개의 교회를 철거했다. 이렇게 부쿠레슈티에서 1983년부터 1988년 말까지 3.8km²의 영역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1977년에 일어난 대지진 당시 파괴된 영역 넓이가 이 철거로 파괴된 지역 넓이의 18%에 불과했기에 이는 역사상 평화시에 일어난 가장 큰 도시 파괴라고 한다. 차우셰스쿠가 얼마나 철거를 좋아했는지 당시 루마니아 사람들은 차우셰스쿠의 부쿠레슈티 파괴를 [[히로시마시|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에 빗대어 차우시마(Ceaușima)라는 말을 즐겨썼을 정도였다. 참고로 '차우시마'로 간주된 5km² 중 절반이 부쿠레슈티 역사지구의 약 20~25%를 차지하는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이었다. * 대중 집회의 앞줄에서 노동자를 가장한 비밀경찰들을 세워놓고 차우셰스쿠를 찬양하게 했으며,[* 이때 일반인들은 그냥 환호하는 시늉만 했다.] 음량이 부족한 환호는 미리 녹음한 환호성을 확성기로 재생하는 방식으로 만회하며 국민들에게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꾸몄다. 실제로 그의 집권 당시 마지막으로 있었던 거리 행진에서도 국민들이 소극적인 반항으로 아무도 함성을 지르지 않자 영상에서 소리를 합성해 넣었다. * [[김일성]]의 부자 세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그것까지 벤치마킹 해 자기 자식에게 권력을 물려주려고 시도했다. 그 후계자로 낙점된 사람이 바로 막내아들 니쿠 차우셰스쿠. * 집권 말기인 1989년에는 상점에 고기, 계란, 우유가 없다시피 했는데도 '루마니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차우셰스쿠 동지의 지도력 하에 루마니아 인민들은 '높은 생활 수준'을 가지게 되었다'고 선전하며 그 '증거'로 선반들이 식료품으로 가득 찬 상점을 차우셰스쿠가 방문하는 모습을 국영 방송으로 송출했는데, 당연히 이 상점은 촬영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연극 무대'였다. * 자신을 '애민 정신이 강한 지도자'로 선전하며 자신의 실책들을 모두 아랫사람들에게 떠넘겼고, 따라서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국민들은 '차우셰스쿠가 상황을 알기만 한다면 쇠빗자루를 들고 가게 주인들을 공격할 텐데'라고 믿게 되었지만,[* 다만 이는 적어도 차우셰스쿠가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1973년의 증언이란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실제 차우셰스쿠는 휴일마다 하술할 초호화 저택에서 호화로운 잔치를 열었다. * 후술할 것처럼 사치 생활은 북한의 김씨 일가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으나,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그런지 의외로 호화로운 식사는 즐겨먹지 않았고,[* 이와 비슷하게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나 [[로버트 무가베]]도 차우셰스쿠 이상의 사치 생활을 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한 것과는 정반대로 식생활만큼은 채식 위주로 검소하게 했고, 세계 최악의 부패 독재자로 꼽히는 [[수하르토]]는 한술 더 떠 장관들과 [[컵라면]]을 끓여먹기도 했을 정도로 식생활이 소탈했다.] 그 대신 염소 치즈, 사워 크림에 계란을 얹은 채식 라자냐, 젤리에 넣은 루마니아식 잉어, 간단한 토마토, 양파, 페타 샐러드를 곁들인 스테이크, 특히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 요리한 스튜 등 상당히 서민적인 식사를 즐겨 먹었다.[* 물론 당시 루마니아 서민층의 밥상에 동물 사료로 만든 빵이 등장하고 평범한 와인조차 최고급 음식점에서야 먹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상당히 호화로운 식사를 먹었던 셈이긴 하지만, [[김정일]]처럼 샥스핀 등 해외에서 직수입한 최고급 재료들로 만든 요리를 먹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차우셰스쿠는 평소 의심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답게 이런 음식들도 제대로 믿지 못해 재료들도 루마니아의 일반적인 농촌이 아닌 국영농장에서 공급한 재료들만 먹은 것은 물론이고, 음식을 먹으려면 소량을 연구실로 먼저 보내 검사를 거치게 하고는 24시간 동안 별도로 보관한 후에야 비로소 먹었으며, 식사 때마다 영양사와 감별사가 함께 동행해야 했다. 덤으로 차우셰스쿠는 해외 순방을 갈 때에도 이동 식품 검사실을 갖추며 식사 검사를 할 세쿠리타테 장교와 함께 자기가 먹을 음식을 들고 다녔다. 이런 차우셰스쿠는 공식 연회에서 자신에게 제공된 음식들을 모조리 바닥에 쏟아붓고는 가능한 한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 차우셰스쿠를 비방하는 내용의 전단이나 [[대자보]]가 루마니아 전역에서 유포되기 시작했는데, 차우셰스쿠는 이들이 [[타자기]]로 쓰여졌다는 것을 알자 1983년 3월 경에 루마니아 전국에 [[연산군/생애#s-6.5|타자기 대여를 금지시키고 사용하더라도 경찰의 증명서를 받아야 가능하게 했다]]. * 깉은 해 [[크리스마스]]에 '크리스마스가 정상 근무일이라는 것이 이상하다'는 설교를 한 게자 팔피(Géza Pálfi, 1941~1984)라는 이름의 사제를 바로 그 날에 연행해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결국 그 사제는 구타 후유증으로 3달도 못 버티고 죽었다. * 말년의 10년 동안 [[당뇨병]]을 앓았음에도 수년 동안 치료를 안 받았는데, 그 이유는 차우셰스쿠가 선술했듯이 [[주치의]]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로 의심이 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내 엘레나가 차우셰스쿠에게 [[인슐린]] 주사를 주기적으로 투여해 줘야 했다. * 1989년 3월에 원로 공산당원 6명이 차우셰스쿠의 정책들을 비판하는 편지를 보내자, 차우셰스쿠는 이들을 반역자로 몰아간 후 강제로 체포하고 심문한 후 4명을 가택에 연금시키고 2명을 구금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 중에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창설자 중 한 명이었던 데다가 무려 '''94세'''의 노인이던 콘스탄틴 퓌르불레스쿠(Constantin Pîrvulescu, 1895 ~ 1992)도 있었다.[* 물론 차우셰스쿠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는지, 엄청난 고령이던 퓌르불레스쿠까지 구금시키지는 못했고 루마니아 동부로 강제로 이주시킨 후 연금하는 데서 그쳤다.] 물론 근거가 없거나 과장된 야사들이 사실인 듯 퍼져나간 것들도 일부 존재한다. * 자국인들이 [[구두]] 1켤레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의 가게를 다녀야 할 만큼 경제 사정이 어려웠음에도 차우셰스쿠가 낭비를 일삼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매일 새 와이셔츠나 양복을 입고 나서 버렸고 그 옷을 [[곤룡포]]처럼 불태웠다는 루머가 있었는데, 차우셰스쿠가 몰락한 직후인 1990년에 차우셰스쿠의 양복 재단사가 사실이 아니라고 증언했다.[* 사실 곤룡포 역시 불태워졌다는 것은 루머로 밝혀졌다. 정말로 한 번 입고 불태워졌던 옷은 [[잉카 제국]]의 [[사파 잉카]]가 입던 옷이다.] * 차우셰스쿠의 실제 [[별명]] 가운데 하나는 '루마니아의 [[흡혈귀]]'였는데, 그 이유는 생전에 주기적으로 건강한 어린아이들의 피를 수혈받았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차우셰스쿠의 양복 재단사가 차우셰스쿠의 사후 흡혈귀 전설을 연상시키기 위해 지어낸 거짓으로 판명났다. * 1977년 3월 4일에 수도 [[부쿠레슈티]]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차우셰스쿠가 '구조작업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물자 수송을 원활히 하기 위해 건물의 잔해를 치워야 한다'며 매몰자가 1천명 가량 생존해 있던 상황에서도 구조 작업을 중단하고 잔해를 그냥 [[불도저]]로 [[원저우 고속열차 추락 사고|싹 밀어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말이 있으나, 실제로는 [[나이지리아]]를 국빈 방문했다가 지진 소식을 듣고는 루마니아로 황급히 귀국하여 지진 현장에서 생존 한계로 간주되는 기간을 넘어서도 희생자들을 계속 구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차우셰스쿠가 이 지진 이후 '공산주의 이전의 부쿠레슈티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부쿠레슈티를 건설해야 한다'는 생각을 실현할 기회로 삼으며 자기 취향에 맞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 수천 채의 집을 불도저로 파괴한 것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 제국]]의 [[네로]]가 [[로마 대화재]] 후에 화재로 피해를 입은 장소에 '황금 궁전' 등 자기 취향의 건축물을 지은 것이 '네로가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내용으로 와전된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 차남 니쿠가 형 발렌틴, 누나 조이아와 달리 노는 것을 좋아해서 각국의 외교관들이 모여 만찬이 진행 중인 탁자 위로 올라가 [[소변]]을 갈겨댔다는[* [[술]]에 취해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 설이 퍼져 그가 아주 개념 없는 인간이라고 여겨질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차우셰스쿠 사후 1년 뒤인 1990년, 니쿠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이유는 차우셰스쿠의 자식들 가운데 아들 니쿠가 차우셰스쿠의 부부에 대한 불만 표출이 가장 적었고 그도 물론 비밀경찰의 감시 아래에 있었지만 공개적으로 이들의 만행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시민들은 니쿠가 차우셰스쿠에 협조했고 온갖 문란하고 난잡한 생활을 일삼았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재판에서 니쿠의 모습은 정상적인 수준을 넘어서 개념찬 사람이라는 증언과 사실이 많이 발견되었다. 1989년 12월 혁명이 있기 몇 년 전 니쿠가 시비우 지역 당 1서기로 있을 때 식량배급량을 늘리는 등 여러가지 책임감 있는 조치를 취했다고 하며 재판에 나온 많은 증인들은 니쿠가 [[시비우]] 주민들의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증언했으며, 니쿠가 발렌틴과 조이아 수준은 아니더라도 재평가를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심지어 세계올림픽에서 여자 체조 부문의 스타로 떠올랐던 [[나디아 코마네치]]에게 구애를 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녀의 손톱을 뽑아버렸다는 이야기 등 나디아 코마네치와 관련된 모든 루머들은 전부 거짓으로 확인되었다. 니쿠가 학창시절부터 워낙 놀기를 좋아했는데다 술버릇이 고약했고, 여자관계가 방탕했던 것들까지은 전부 사실이나, [[강간]]을 일삼고 난잡한 성관계를 예사로이 한 것에 학대 행위를 즐겼다는 소문은 어디까지나 당시 루마니아의 영 좋지 않은 경제 상황과 사기가 [[급전직하]]하자 흉흉한 민심 속에 터져 나온 루머일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